선생을 만나러 가는 차 안에서 문득 정현종 시인의 시 방문객이 떠올랐다.
내 마음이 그 바람을 조금이라도 흉내낼 수 있을까? 적이 걱정되었다. 선생을 모시고 앉을 자리를 찾아 병산골로 들어서면서 불현듯 어려운 숙제를 떠맡았다는 중압감이 밀려왔다. 그런데 익숙한 풍경이 곧 마음을 편안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길 양쪽 벚나무들이 줄지어 손을 흔들어주었고 바람이 푸른 잎사귀를 갈피마다 더듬어 녹음의 함성이 싱그러웠다. 병산저수지는 오랜 가뭄에도 물을 가득 안고 있었다. 둑에는 야생화들이 하늘거렸다. 이곳은 필자가 평소 산책하는 곳, 눈에 띄는 모든 것이 이내 낯익은 이를 알아보고는 화대를 했다. 이들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들이 선생의 내면에서 무언가를 끌어내도록 도와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다.
찻집에 앉았을 때 선생의 가방이 제법 묵직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작품집 외에 저서도 몇 권 있지요?라는 질문에 꺼내놓은 책 중 한 권을 집어 들어보니 미국 소수 문학을 다룬 것이었다. 두게와 제목만으로도 시간과 공을 많이 들였을 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책날개를 펼쳐보고는 가지고 나온 것 외에도 몇 권의 저서를 더 낸 것을 알 수 있었는데 공저서 두 권에 번역서도 보였다. 수필집도 필자가 읽은 것 외데 두 권이 더 있었다. 필자는 최근 수필집 두 권에 소설책 한 권 읽은 독자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 두 권의 수필집만이라도 다 읽고 자리에 앉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생겼다.
준비가 덜 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먼저 부대문학상 소설부문 수상에 관해 물었다. 대학 1학년 때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영예를 안았다는 것은 그 당시 대단한 사건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 순식간에 유명인이 되었지. 노학자의 눈빛에서 이내 먼 옛적 문학청년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문학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본격적으로 품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시작으로 선생은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실타래 풀듯 줄줄 풀어냈다. 그 후 선배들의 권유로 문학 동아리 간선에 가입하고 제대로 글을 써보고 싶은 마음에 학교를 졸업하고는 잠시 조용한 섬 학교 교사생활을 하기도 했단다. 그렇게 선생의 일생은 간간이 소설을 쓰며 교편을 잡는 쪽으로 방향이 잡힐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일은 예측할 수 없는 일, 그즈음 당시 대학 은사님 두 분에게서 “글을 쓰는 일은 나중에라도 할 수 있지만, 학문은 때를 놓치면 영영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시면서 학문을 계속해 보는게 어떻겠냐고 권유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학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는데 교수 생활을 하면서부터는 눈앞의 공부에 매달리게 되고, 그러다 보니 작품을 쓸 시간을 내는 것이 점점 어려워져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 하는 소설은 엄두도 못 내고 간간이 수필을 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고. 그런 선생에게 평론가 친구가 글을 제대로 쓰려면 문학계에 이름을 올리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조언하여 선생은 2006년 계간 수필춘추를 통해 등단한다. 그렇게 꾸준히 글을 쓰면서 2010년에는 부산대학교 평생교육원에 수필아카데미 강좌를 개설하여 무려 10년 간 강의했는데 지금은 그 자리를 후배한테 물려주고 한 학기 한 번 특강을 맡고 있다.
수필은 어느 문학 장르보다 친근하다. 선생의 글에서 보면 수필을 문학의 장르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도 있는 모양이지만 수필만큼 있는 그대로 다정하게 다가오는 것도 없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자신만의 언어로 펼쳐내는 세계를 만날 때면 한 사람의 숲이 이렇게 깊은가 경탄할 때도 있다. 섬세하고 정갈하게 펼쳐내는 향기를 맡으며 메마른 마음이 촉촉해지기도 하고 맑아지기도 하고 눈이 번쩍 뜨이기도 하고 서로의 적막이 겹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어떨 땐 그만한 친구나 그만한 연인도 없어 한참이나 그 숲에 머물다 나온다. 글의 역할은 무엇보다 독자에게 흘러들어 독자를 흔들어 깨우고 독자의 외로움에 지적이고도 고결한 숨결을 불어 넣어 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수필이야 말로 작가와 독자가 직접 소통하는 가장 가갑고도 친절한 글 형식이 아닐까?
선생의 작품을 읽으면서 선생의 생활이 그대로 그려졌다. 수필의 성격이 그러하듯 실은 따로 질문이 필요없을 정도로 이미 가깝게 알고 지내는 사이처럼 여겨졌다. 날마다 정관 주변을 산책하고 글 읽고 글 쓰고 인생을 생각하고 가끔 회상에 젖고 몸 불편한 아내 돌보고 아직도 궁금한 것이 많아 끊임없이 연구하고 현장을 찾아 나서니 여든을 코앞에 두고 있지만 심심할 새가 없는 일상이다. 한 인간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또 한동네 주민으로서 현실에 뿌리를 둔 글은 학문이 추구하는 이상과의 균형을 잘 맞춰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랫동안 파킨슨병을 앓아온 아내를 부축하며 걷는 길 위에서 동행이란 상대방이 나와 함께 걷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대방과 함께 걷는 것임을 깨닫는다. 아내를 잘 간호하려면 자신의 건강을 먼저 챙겨야 한다며 아침에 걷는 일을 쉬는 적이 없다 아내와 화전을 부쳐 먹기 위해 진달래꽃을 따러 가기도 하고 밥 먹고 설거지를 하면서 이 당연한 일을 너무 늦게 하게 되었다고 후회하기도 하고 언젠가는 다가올 죽음을 생각하며 아들을 데리고 가족 묘원을 찾기도 한다. 어느 부분에서는 가슴 한쪽 영원히 늙지 않는 소년이 자리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사는 곳의 수돗물이 어디서 오는 건지 궁금하여 상수도 사업본부에 전화를 걸어보는 글을 읽다가는 웃음이 빵 터졌다. 필자도 같은 동네에 살면서 늘 궁금했지만 전화해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뿐만이 아니다. 그는 좌광천 발원지를 찾아 산속을 따라 올라가 보기도 하고 매년 철새 수가 줄어든다는 소식에 걱정이 되어 낙동강 하굿둑을 찾기도 하고 고향의 자연생태를 파괴하고 있는 아파트 신축 공사현장을 둘러보며 마음 아파하기도 한다. 그는 책상에서만 글을 쓰지 않는다. 몸으로, 마음으로 찾아 나선다. 그는 자연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관계를 소중히 여긴다. 거기에서 자연스레 글이 나온다. 선생의 글을 읽으면 수필은 기교의 문학이 아니라 나이의 문학이라고 한 부산 수필가 박문하 선생의 말이 무척 공감된다.
그런데 역시 학자의 면모가 드러나는 글도 많다. 생명의 그물망 6부에 따로 엮은 긴 에세이 부분은 특히 그렇다. 영문학뿐만 아니라 국문학 쪽으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가사문학, 유배문학을 다루고 있는데 송강에 대한 글은 담양으로 여행을 가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고 윤선도는 기장에 정착하고 난 뒤 관심을 가지고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탐구정신과 연구정신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아마 이런 정신으로 역사의 아픔도 다루게 되었을 것이다. 그동안 수필만 써오다가 2017년에는 드디어 소설 형식의 책도 하나 냈는데 부산에서 벌어진 임진왜란의 참상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을 언급하자 그는 부산사람으로서 제대로 구현해보고 싶은, 또 마땅히 구현해야 하는 책무를 느꼈다고 한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 그의 핸드폰 신호음이 울렸다. 사모님에게서 온 전화였다. 사모님이 돌봄 주간 보호센터에 갔다가 오후 4시쯤 집에 도착하시는 모양이었다. 시간을 보니 그 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선생은 늘 시간에 맞춰 모시러 나가야 하는데 이미 그 시간을 놓쳐버린 것이다. 관계자한테 오늘만 부탁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서둘러 있어났다.
아파트에 모셔다 드리고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선생은 필자가 출발하여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리를 드지 않고 있었다. 배려하는 마음의 여운이 집에 도착할 때까지 짙게 깔렸다. 글은 글에서 끝이 아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글을 완성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