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금소리 풍기는 수필 같은 삶

지난해에 우리 문협의 원로 회원인 안대영 수필가가 작고하였다. 크게 번졌던 역병 때문에 친척과 가까이에만 알렸다고 한다. 안 수필가를 생각하면 풍금소리처럼 포근한 분으로 또 수필같이 잔잔하고 정갈한 모습으로 떠오른다. 나는 선생님께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그 빚을 하나도 갚지 못했다. 격려 말씀뿐 아니라 필요한 책도 챙겨주어 고마운 맘을 간직하고 있다. 내게 만이 아니라 늘 다정다감한 분이었다. 내가 아는 선생님의 삶은 대체로 다섯으로 나눌수 있다. 교사생활, 향토사학자, 한국기독교박물관 설립 및 관장 봉직, 지역사회 활동, 수필가로서 한결같이 성실하고 겸손한 발자취이다.

교사로는 부산교대의 전신인 부산사범대학 음악과를 나와 출발하였다. 초등학교에도 근무하였으며 하동군 횡천중학교 음악 교사 등을 거쳐 부산 금성중학교에 근무하였으며 교감으로 정년 퇴임했다. 행토사학자로는 기장군지 철마면지 편집에 참여하였으며 부산의 자연마을, 기장지역향토시가 연구 등 다수 저서를 남겼다. 또 동래구 수안동에 있는 동래중앙교회 장로로 시무하며 기독교박물관 설립을 주도하였으며 관장으로 봉직했다. 교회 별관에 있는 이 박물관에 평생 수집한 것을 기증하였는데 1911년 본 최초 한글 구역성서, 1895년 본 천로역정 번역 책자, 선교사 타자기, 1905년 최초의 여권, 1919년 독립선언문, 1921년 독립자금송금 영수증을 비롯한 4천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이 물품 가운데 1908년 철마교회에서 쓰던 풍금은 부산의 숨겨진 보물에 선정되었다. 2012년에 부산의 보물을 찾아라 시민 공모에 부산 기네스 탑10에 뽑힌 것이다. 지역사회 활동으로는 타고난 부지런함과 관심으로 주변을 돌보았다. 주위 사람이나 신문사에서 찾으면 조언과 자료 주기를 마다않았다. 교가를 작곡해주기도 했으며 학교박물관에서 봉사활동도 했다. 문학활동으로는 수필집으로 목동의 노래, 목동의 피리, 풍금에 창가 싣고를 내었다.

안선생님의 생몰년 1936.6.9~2021.8.25에 따른 연보를 배열하고 제대로 된 일대기를 내었으면 좋겠다. 이는 향토사 측면에서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배춧잎이나 나물을 데치거나 삶아본 이는 안다. 재료를 데쳐보면 훨씬 줄어드는 걸 볼 수 있다. 그러나 선생님의 족적은 짐작보다 크고 많았다. 이번에 살펴보니 마른 미역으로 국을 끓이는 것처럼 외려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었다. 이는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이타적인 자세 때문이지 싶다. 돌아가시기 3년쯤 앞에 편찮으신 걸 알고 찾아뵙고 싶다고 전화했다. 그러나 한사코 안 와도 된다고 했다. 그즈음에 기장군 지인 원로께서 병문안해야 하니 연락을 하라고 했다. 전화를 드려 원로를 모시고 가겠다고 하니 안와도 된다는 같은 말씀이라 끝내 문안을 못 하였다. 여동생인 안하련씨에게 집안 내력을 물어보았다. 아버지 고향은 일광면인데 일찍이 아버지 처갓집 동네인 철마 장밭으로 이사하였다고 했다. 1950년대 후반에 다시 동래로 이사를 하였으나 부동산 일부는 철마에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 고향인 철마 장전리에 외갓집이 있으며 자형이 되는 문장호 전 군의원 집이 있어 향리에 자주 다녔다고 한다. 철마면을 지나치면 고인이 생각난다. 장전리에 있는 장전구곡가 시비 건립도 주도하였다. 철마초등학교 교가를 작곡하였다. 또 큰 길 옆 작은 동산을 애향동산이라며 가꾸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런 곳들을 지나치노라면 눈길이 가며 걸음이 멈춰진다. 평소 정정하고 단정한 모습이라 이렇게 떠나실 줄 몰라 애모의 정을 가눌 수 없다. 한편으로 섬기며 나누는 삶으로 존경을 받았으니 성공작 인생이라 부럽기도 하다.

기장문학 23호(2018년)의 인물탐방 편에 선생님 기사가 있다. 당시 박정애 회장이 설두하고 이원자 시인이 썼다. 살아있는 박물관, 안대영 선생님을 만나다라는 제하에 7쪽 분량이다. 섬세한 감성으로 선생님의 생애를 정감있게 나타내었다. 짬을 내어 기장문학 구호를 찾아 이 기사와 여러 권에 실려 있는 작품들을 정독하려 한다. 기장문학 22호(2017년)에 실린 수필 회동 수원지 이야기가 고장 역사도 되어 일부를 옮긴다.

회동 수원지로 인해 장작을 실은 달구지는 새벽닭이 울 때 철마를 출발한다. 지금의 상현마을 다리를 건너 선동 고개를 지나 온천장, 동래, 조방앞, 초량, 영도까지 화목을 싣고 팔러 갔다. 당일 싣고 온 화목을 다 팔지 못하면 달구지만 남겨두고 쇠 죽통은 짊어지고 100리 길을 걸어서 돌아와 나머지 화목은 다음날 다시 달구지가 있는 곳으로 가서 팔았다. 장작을 모두 팔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소달구지를 타고 왔다. 가끔 밤늦게 귀가할 때 올 바윗골 범굴 근처에서 살쾡이를 만나는 일이 종종 있어 기찰 탁주 도가에서 탁주 일 배로 목을 축인 후 여러 사람이 모여 나선다. 황소 달구지를 선두로 약 50여 대의 달구지가 줄지어 미군이 쓰고 버린 야전군용 살충제 깡통으로 만든 요령소리를 울리면서 자갈길 철마로 돌아오는 행렬은 참으로 장관을 이루었다.

조선시대에는 경치가 아름다운 곳으로 호수에 접하고 전망이 좋은 절벽이 있어 오륜대라 불렀다.

철마면 장밭 마을에서 서쪽으로 나가면 구곡천을 건너서 노포동으로 가는 길이 이어진다. 삼거리 가까이에 있는 다리를 건너 250미터쯤 도로가에 비석이 보인다. 가로가 두 자 남짓이고 세로는 그보다 조금 짧은 비석이다. 이 비석은 애향동산의 입구라고 안 선생님이 세운 시비이다. 이 비석 옆에는 옥수정이라 새겨진 명패 돌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정자가 쓰러져 없어지니 명패가 그 자취를 보듬고 있는 거 같았다. 작은 시비의 내용을 보며 고인의 애틋한 애향심을 다시 추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