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도시에나 공터는 있게 마련이다. 또 그 공터에는 나 같은 공터의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공터를 어슬렁거리며 자신만의 공터를 만끽하는 사람 말이다.
공터는 성격이 독특하다. 공터에 있으면 아무 일에도 연관되어 있지 않고, 누구와도 관계없다는 자유로움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타인과 함께 있다는 안도감을 준다. 이것이 공터가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공터에 있다는 말은 경계 안에 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밖에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만약 당신이 공터에 혼자 있다고 해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지금 공터에 있는 다른 누군가와 따로 있지만 함께 있다는, 가벼워서 편안한 연대감마저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공터는 나름대로 다 용도가 있지만, 그건 그 공터를 운용하는 쪽이 정한 용도일 뿐이다. 그 용도란 것은, 그 용도로 이름 지워진 공간을 스스로 공터라고 명명하고 누리는 공터의 사람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다.
나는 그런 공터에 가기 위해 직장에 연가를 낸 적이 여러 번 있다. 모두 열심히 직장에서 근무하느라 한산해진 평일의 공터는 신비한 힘이 넘치기 때문이다. 그 이상한 힘은 나에게 말한다. 어서 공터로 오라, 반복되는 일에 당신의 시간을 날려버릴 때가 아니다. 공터에서 새로운 시간을 꿈꾸어라.
나에게 그 공터는 집 가까이 있는 어떤 경기장의 주차장이다. 경기는 보통 평일 저녁이나 주말 오후에 열리기 때문에 평일 낮이나 주말 아침에 이 커다란 주차장은 공터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오롯이 유익한 공터가 된다.
이곳이 공터의 시간이 되면 드디어 느티나무가 보이고 까치, 공벌레와 개미가 보이고 강아지풀, 타래난초, 왕골이 자세히 보인다. 느티나무는 어떻게 뜨거운 햇빛을 이고 그늘을 만들고 있는지, 까마귀는 어떤 상황에서 아무런 경계도 없이 당신 가까이 오는지, 턱시도 고양이가 공터를 가로지르기 위해 어떤 경로를 어떤 장단으로 가는지 알게 되는 때인 것이다. 이런 배움은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배움이며, 특히 사무실에 앉아 알 수 있는 배움이 아니다.
또 공터에는 무언가를 배우는 사람들이 많다. 무엇이라도 자진해서 열심히 배우는 사람들을 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점은 공터의 매력이자 격려이며 위안이다.
비틀거리며 오토바이를 배우는 중년들은 아마도 새로운 라이더가 되어 도시를 누비게 될 것이다. 그들은 도시의 무서운 거리를 무사히 달리기 위해 우선 공터에서 자신의 몸을 기계에 알맞게 연결시키는 연습을 거듭한다. 스마트 폰을 화단 끝에 올려놓고 춤을 연습하는 젊은이, 어떤 연설을 큰소리로 반복하는 중년도 있다. 목검을 휘두르는 청년도 있다. 공터는 사람들에게 스케이트 보드에 몸을 싣게 하고, 안전하게 주차하게 하고, 단소 소리를 점점 청아하게 단련시켜 준다. 나도 줄곧 특정 느티나무와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사이가 되었다. 공터에서 쓴 시는 다소 환상적이긴 하지만 그것은 느티나무가 사람보다 더 내 말을 잘 알아듣기 때문일 뿐이다.
저마다의 가슴 속에도 공터가 있다. 당신과 내가 다르듯이 각자의 공터는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과 타인이 가진 공터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삶의 지혜를 얻기도 하고 알게 모르게 타인에게 가르침을 주거나 꿈꾸게 할 수 있다. 공터는 지금도 그렇게 새로운 공터의 사람들을 길러내고 공터의 사람들은 오늘도 각자의 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