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고을 배움터

부산 동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기장은 산지와 바다로 둘러싸여 절경이 풍부하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유서 깊은 지역 문화재가 서서히 깨어나면서 기장을 새롭게 평가한다. 예부터 한적한 바닷가 변방으로 여겼지만 산 좋고 물이 좋아 사람 살기 좋은 고장이다. 기장을 밝히는 역사 속 뒷배가 무엇일까.

기장 향교는 기장 고을의 옛 배움터이다. 기장 읍성의 동쪽 야트막한 산자락에 자리한 기장 향교는 화려하거나 초라하지 않은 모습이 아담하고 정겹다. 향교에서는 중국과 조선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유학을 가르쳤다. 조선의 교육기관으로 인재 양성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기장은 서울인 한양에서 보면 바닷가 변방으로 바다 건너 왜의 잦은 출몰로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곳으로 여겨졌다. 혼란스러운 기장에 무관 출신 현감이 임명되었다. 향교가 있다는 것은 기장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전국에 이백 서른 네개의 향교 중 하나가 기장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장이 얼마나 중요한 지역인가를 보여준다. 기장 향교가 기장의 꿈이요, 미래였음을 엿볼 수 있다.

기장 향교에 들어서면 팔작지붕의 다채로운 단청이 눈길을 끄는 풍화루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향교의 중심이 되는 강학 장소인 명륜당이 정중앙에 있고,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이 명륜당 뒤 조금 높은 자리에 있다. 좌우에 마주 보고 서 있는 동재와 서재는 아궁이와 굴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의 기숙사 역할을 했지 싶다. 지금처럼 교통이 편리하지 않았으니 인근 마을인 정관, 철마 등지에서 공부하러 온 유생들이 숙식하며 공부하였으리라. 보통 공부하는 유생의 나이가 십육세 이상인데, 기장 향교는 십 일세부터 공부한 곳이라 한다. 나이 어린 유생들이 일찍부터 집을 떠나와 숙식하며 공부에 전념한 모습이 지금 눈으로 봐도 전혀 낯설지가 않다. 우리네 부모님의 자식 공부에 거는 기대와 열정이 오늘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님을 짐작하게 한다. 고교 시절 부모 곁을 떠나 객지에서 밤마다 고향 하늘을 바라보며 주자십회를 되뇌며 눈물 짓던 모습이 생생하다. 유리알 보석이 흩뿌려진 별이 빛나는 밤에 어린 유생들도 고향 하늘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명륜당은 향교에서 유교를 강학하는 곳이다. 학습이 이루어진 명륜당이 지금의 교실과 같으리라. 지금은 도시 개발로 눈앞 전망을 가리지만 그 때는 명륜당에서 바라보면 앞이 확 트여 있어 마을을 한 눈에 볼 수 있지 않았을가. 넓은 대청이 시원한 모습으로 하나의 공간을 이룬 것이 오늘날의 벽을 허문 열린 교실이 떠오른다. 마루에 길게 줄지어 앉아 공자왈 맹자왈 읊조리는 유생들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여름에는 확트인 대청으로 바람이 통하여 시원하게 공부할 수 있으나 찬바람부는 겨울까지 공부했다면 저 마루에 앉아 어찌 추위를 견뎠을까. 봄이면 인근 산자락에 진달래 피고 뻐꾸기 울고, 여름이면 녹음 우거지고 온갖 새소리 들려오는 숲속 학교에서 온몸이 들썩여 어지 참고 앉아있었을까. 가을이며 명륜당 뒤 맑고 곱게 물든 은행나무가 가을을 노래했으리라, 은행나무가 대성전을 가리고 명륜당을 뒤덮는다고 잘라버려 그루터기만 겅그렇다.

기장향교는 조선시대 유교 이념을 보급하고 향촌민에 대한 교화를 목적으로 세워진 부산의 교육기관이다. 향교는 전국에 하나의 읍에 하나의 학교가 있는 일읍일교의 원칙으로 기장에 설립되었다. 당시 기장에 학교가 있어야 할 만큼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지금의 정관, 일광의 신도시처럼 기장에 많은 사람이 모여 산 것이리라. 정관은 기장의 신도시로 전국에서 가장 젊은 도시이다. 젊은이가 많다는 것은 공부할 아이도 많다는 뜻이리라. 기장의 정관이 젊은이의 도시, 아이를 키우기 좋은 살기 좋은 곳이다. 기장 향교는 기장을 대표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자 선현을 봉사하는 역할을 해 왔다. 기장 향교의 유구한 역사는 명륜당 앞 석주에 핀 석화가 잘 알고 있으리라.

갑오개혁으로 조선시대 오백년 동안 이어진 각종 제도와 관습이 변화되거나 철폐된다. 우리 역사상 최대 규모의 근대화 개혁운동인 갑오경장으로 인해 타격을 받을 곳 중 하나가 향교가 아닐까. 인재 등용 제도인 과거제가 폐지되므로 향교가 더 이상 강학할 수 없다. 과거제 폐지는 양반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으리라. 어린 나이 때부터 과거 준비에 매달린 젊은 유생이나 그 부모는 얼마나 큰 혼란과 충격을 받았을까. 조선시대에 과거제가 아니면 출세할 길이 없으니 과거 공부만이 양반이 할일이라 여기며 살아온 삶이 하루아침에 무너졌으리라. 엄격한 신분제 속에서 체면이 수중한 데 농업, 상업에 종사할 양반이 어디 있으랴. 체면에 죽고 사는 양반이니 붙잡을 거라곤 과거시험뿐이지 않았을까. 훤하게 빛나던 앞날이 새로운 제도 벽에 가로막혔으니 그 얼마나 기가 막혔으랴.

우리 사회가 철저한 신분 사회는 아니어도 경제력에 따라 차등의 삶을 사는 건 사실이니 경제력이 곧 신분을 나타낸다고 감히 말을 해 본다. 좀 더 살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공부밖에 없다고 여긴 적이 있다. 우리는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처럼 개천의 용이 되기 위해 오직 공부에만 전력 질주하여 집안의 기둥이고 희망으로 살아온 세대에 해당한다. 신분 상승의 꿈은 공부 말고는 지금도 요원하다. 고시만이 살 길이라 여기며 준비하는 고시생들이 서울로 모여 고시촌을 만든다. 사법 시험을 준비하던 고시생에게 사법시험이 로스쿨로 바뀌었을때 느꼈을 당혹감과 정신적 혼란을 어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이처럼 과거제 폐지는 오랜 시간 준비해 온 유생들과 그 가족에게 크나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으리라. 당시 막 성인이 된 이승만 전 대통령은 과거제 폐지는 전국 방방곡곡에 묻혀있던 야망적인 청년들의 고귀한 꿈을 산산이 부수는 조치다라고 했다. 모든 제도가 모두를 만족시킬수는 없지 않은가. 아픔없는 성장이 어디 있으랴.

향교를 지탱하는 유교 강학과 제향이라는 양 기중 중 강학이라는 한 기둥이 과거제 폐지로 뿌리째 뽑혀 나가고 만다. 강학 기능을 잃고 지금까지 향교가 지탱해온 이유는 제향 공간 역학을 하기 때문이다. 공자를 비롯한 옛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를 올려 유학의 뜻을 기린다고 한다. 제는 형식도 중요하지만 고귀한 정신이 더 중요함을 보여준다. 유교에서 실시하는 가정 제사는 익힌 음식으로 제를 모시되 다섯 가지 이상은 진설하지 말라고 한다. 제사상에 오르는 음식의 종류와 숫자는 유교에서 정해 준 것이 아니라 가정의례준칙이 제정되면서 제사의 선을 정해 준 것이다. 유교가 제사상에 지나친 형식을 강조한 게 아닌데 사람이 내린 해석으로 인해 명절 스트레스라는 단어까지 만들어 내어 유교를 타박하기도 하는 세태 속에서 유교가 조금은 억울하기도 하리라. 가정에서 모시는 제사 역시 형식보다 조상을 추억하고 기리는 마음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근본이 없는 나가 없으니 나의 현존재의 근원이 되는 부모와 조상을 생각하는 좋은 시간으로 여긴다면 제사에 대한 부담은 한결 가벼워지지 않을까.

우리네 인생사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지 않은가. 향교가 영화와 쇠락의 길을 걸으면서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음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과거와 현재가 공생공존하는 모습이 현대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기장 향교가 기장의 숨은 보석 중 보석이 아닐까.